스페인 독감과 히틀러 집권의 관계

 스페인 독감과 히틀러 집권의 관계  // GPT-4 User 스페인 독감과 2019년 12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의 관계 ChatGPT 스페인 독감(1918년 대 유행)과 2019년 12월에 시작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COVID-19) 사태는 모두 글로벌 팬데믹인데, 여러면에서 유사성과 차이점이 있습니다. 다음은 두 팬데믹의 몇 가지 주요 관계 및 차이점입니다: 유사점 규모와 영향 : 두 질병 모두 세계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며 대규모 사망자를 초래했습니다. 전염성 : 두 질병 모두 높은 전염성을 가지며, 공기 중 전파 또는 접촉 전파를 통해 쉽게 확산되었습니다. 공중보건 대응 : 두 사태에서 모두 정부와 공중 보건 기관이 대규모 격리, 사회적 거리두기 및 다른 공중보건 조치를 시행했습니다. 경제적 영향 : 두 사태 모두 세계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며, 경제 활동의 중단과 실업률의 상승을 초래했습니다. 차이점 시간대 : 스페인 독감은 1918-1919년에 발생했으며, COVID-19는 2019년 말부터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원인 바이러스 : 스페인 독감은 H1N1 인플루엔자 A 바이러스에 의해 일으키어졌으며, COVID-19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SARS-CoV-2에 의해 발생했습니다. 치료 및 예방법 : COVID-19의 경우, 과학자들이 빠르게 백신을 개발하고 투여하기 시작했습니다. 반면 스페인 독감 당시에는 현대적인 백신 기술이 없어 사람들이 바이러스에 더 취약했습니다. 통신 및 정보 전파 : 1918년에는 현대적인 통신 수단이 부족했으므로 정보 전파가 느렸습니다. 2019년에는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를 통해 정보가 빠르게 전파되었습니다. 의료 기술의 발달 : 1918년과 비교하여 2019년에는 의료 기술이 훨씬 발달했으며, 진단과 치료 방법이 더욱 다양하고 효과적이었습니다. 이러한 유사점과 차이점은 두 팬데믹이 역사적 맥락에서 어떻게 비교되는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User 히틀러의 집권과 스페인...

고려의 무인들과 일본의 사무라이들에게 쏘아진 어떤 이상한 기운

 고려의 무인들과 일본의 사무라이들에게 쏘아지는 어떤 이상한 기운? 서기 12세기  더 정확히로는 헤이지(평치=平治) 원년인 서기 1159년.  당시 일본은 고려와는 달리 당당히 황제국을 선언했기 때문에 황제국의 달력을 쓰고있었다. 그래서 연(年)에는 천황이 선포한 연호를 붙였다. 그것이 평치 ...  서기 1159년은 평치의 1번째 해로 원년(元年)이다.....   그리고 이때는 미나모토 요리토모의 아들 미나모토 요시츠네가 태어났다고 정사에 적혀있는 해이기도 하다. 이 때 일본에서 귀족들 시중이나 들던 사무라이들 중 칸무 천황(백제 무령왕의 후손인 백제계 여자의 후손)의 피가  흐르는 '타이라(평씨=平氏=平家=헤이케)' 사무라이의 수장 타이라 키요모리가  라이벌 미나모토 요리토모를 쳐발라버리고 일본열도의 지배자가 된다.   타이라 키요모리 : 이끼끼! 미나모토 요리토모 : 꾸엑 (도망치다가 배신당해 목 잘림) 한편 고려는 여전히 무사들은 귀족들의 천대와 차별을 받았다. 이에 불만을 품고 서기 1170년 정중부,이의방 등 무사들이 거병하여 귀족들을 도륙 대학살하고 고려 왕 의종을 폐위시키고 유배 보낸다.   딱 11년의 차이를 두고 일본에서 무신 정변이 일어나고, 그 후 11년 후에야 고려에서 무신 정변이 일어났다. 무신 정변의 첫 주역이자 고려의 첫 쇼군인 정중부는 서기 1179년 9월 16일 (음력)에 또 다른 무사인 '경대승'에게 반란 당해 뒤졌다. 타이라 키요모리는 서기 1181년 3월 20일에 사망했다.(자연사) 정중부와 타이라 키요모리의 사망 시기는 놀랍게도 몇년의 차이를 두고있을 뿐이다. 타이라 키요모리의 사망 전인,   서기 1180년 4월, 모치히토 왕자는 일본 전국에 숨어있는 미나모토 가문들에게 타이라를 타도하라고 영지(令旨)를 써서 보내고 이끼끼하며 봉기했다가 한달만에 타이라에게 토벌되어 비참하게 최후를 맞았다. 하지만...

고죽과 낙랑의 관계

 고죽과 낙랑의 관계  //하룻밤에 읽는 고죽국 역사  ​ 고죽국은 베이징 동북쪽 난하 방면에 있으며, 은나라 피가 섞인 북방 야만족으로 기원전 7세기 때 중국 산동반도의 군벌인 환공이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정벌하여 고죽과 이웃 마을 '영지' 뿐 아니라  요서 조양시의  '도하'란 종족과 요서 홍산의 '산융'까지 모두 환공에게 격파되어 복속당했습니다. (이 산융,고죽,영지,도하가 바로 비파형동검을 처음으로 만든 요서의 패왕 기마민족 '하가점상층문화'입니다.) 그후 베이징의 연나라 문화의 영향이 서서히 들어와서 비파형동검 문화의 중심지는 요동으로 이동했다가 다시 요서에서 비파형동검 문화가 창성할 조짐을 전국시대 초기 쯤에 보이다가 연나라 장수 진개에게 정벌당해 요서는 물론 요동까지 연나라 땅이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고조선 문화는 북한 땅으로 쪼그라들었습니다.  ​ //그런데 혹자들은 고죽국이 있던 곳(베이징 동북쪽 난하 방면)에 '낙랑'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 //낙랑이란? 낙랑은 고조선 말기 위만조선 당시 위만조선의 심장부인 북한 평양 일대를 일컫던 지명 혹은 고조선의 또 다른 국호로 추정됩니다. 한나라가 고조선 그러니까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식민지를 설치할 때 식민지의 이름을 '낙랑'이라 하였습니다. ​ //베이징 혹은 난하 쪽에 낙랑이 있다는건 사이비들의 주장  어떻게 한나라가 설치한 식민지 낙랑이 난하의 고죽에 있겠습니까. 북한 땅에 있다고 봐야 맞습니다. ​ //하룻밤에 읽는 낙랑군의 커맨드센터 이동 서기 313년 고구려 미천왕이 얍얍하고 퍽퍽 패서 낙랑군이 으악하고 만주 서쪽 요서로 날라갔습니다.(중국 기록에 그렇게 나옵니다.)  그때 요서에는 '모용선비'란 무시무시한 기마민족이  살고있었습니다. ​ 그 후 서기 420년 쯤 고구려 장수왕 때 고구려의 영향력이 요서에까지 미치고 있었습니다. 서기 420년 쯤 북위 황제가 요서 모용선비 땅으로 이사가있...

책사풍후의 패수(浿水)의 위치 연구

이미지
  책사풍후의 패수(浿水)의 위치 연구 패수(浿水)의 위치 사마천의 '사기'의 조선전을 보면 한나라 침공군 중 육군 5만은 요동을 떠나 패수(浿水)로 돌격한다. 그때 패수의 서쪽엔 위만조선 육군이 주둔하고 한나라 육군을 참패시킨다. 한나라 수군 7천은 산동반도에서 바로 바다를 건너 위만조선의 수도 왕험성 근처 '열구'에 상륙한다. '열구'는 '열수'란 강물의 하구다. 바로 왕험성으로 개돌하려다가 우거왕이 바로 뛰쳐나와서 쳐발라버리니 한나라 수군은 사방으로 흩어져버렸다.  근데 결국 패수 서쪽 혹은 패수 위에 주둔하던 위만조선 육군은 한나라군의 인해전술에 쳐발리고 왕험성으로 퇴각한다. 한나라 육군은 패수를 건너 바로 왕험성에 당도한다. 사기 조선전 기록을 보면 위만조선의 수도 왕험성은 해변가 가까이 있고, 패수로부터 얼마 안되는 거리에 있고, 패수 근처에 '요동'이란 땅 혹은 한나라의 식민지 요동군의 한 마을이 있을 수 있다. 왕험성과 패수 사이에는 또 다른 강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어쩌면 왕험성은 강으로 둘러싸인 섬같은 지형일수도 있다. 그리고 왕험성 근처엔 '열수'란 강물의 '하구'가 있다. // 1. 위만조선의 수도 왕험성은 해변가 가까이 있고, 패수로부터 얼마 안되는 거리에 있고, 2. 패수 근처에 '요동'이란 땅 혹은 한나라의 식민지 요동군의 한 마을이 있을 수 있다. 3. 왕험성과 패수 사이에는 또 다른 강이 없음을 알 수 있다. 4. 어쩌면 왕험성은 강으로 둘러싸인 섬같은 지형일수도 있다. 5. 그리고 왕험성 근처엔 '열수'란 강물의 '하구'가 있다. // 그런데 이런 정리를 헷갈리게하는 사료가 있다. 낙랑군 누방현에서 흘러나와 동남쪽으로 흘러 임패현을 지나 바다에 빠지는 패수浿水(수경,설문해자) 수경과 설문해자의 기록이 그것인데. 수경은 서기 5세기 때의 기록이라서 낙랑군이 요서,베이징으로 이사간 당시의 ...

일리천 전투와 궁예가 벤 신라 왕 화상에 대한 연구

이미지
 일리천 전투와 궁예가 벤 신라 왕 화상에 대한 연구 글쓴이 : 책사풍후  적벽대전,나가시노 전투 하면 오~ 거리는데. 일리천 전투 하면 그냥 애비 자식 사이 안 좋아서 분열난 불쌍한 후백제를 왕건이 견훤을 앞잡이로 해서 압도적 무력으로 밟아버린 사건 뭔가 엄청난 전투! 이런 이미지 보다는 그냥 후삼국 시대의 마지막 전투 때 고려의 ㅎㄷㄷ한 대규모 기병을 보여준 사건 그냥 이 정도로만 인식됨. 반도인 자체의 자국 역사 혐오와 사대주의 탓도 있지만 일리천 전투를 그림으로 남기지 않은 고려의 탓도 큼. 당시 기록을 보면 일리천 전투 때 백제의 군사력이 얼마나 되었는지는 안 적혀있으나 고려가 8만 5000의 대병력을 동원한 점 고려의 군사력의 상당수가 기병에 집중되어있는 점 신검 양검 용검 금강이 나란히 다 살아있을 때 견훤이 아들들한테 후백제의 군사력이 고려보다 2배로 많다고 언급한 점을 보면  "병신년 정월에 견훤은 그 아들에게 말했다. “내가 신라 말에 후백제를 세운 지 여러 해가 되었다. 군사는 북쪽의 고려 군사보다 갑절이나 많으면서 오히려 이기지 못하니 필경 하늘이 고려를 도우는 것 같다. 어찌 북쪽 고려왕에게 귀순해서 생명을 보전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그 아들 신검(神劍)·용검(龍劍)·양검(良劍) 등 세 사람은 모두 응하지 않았다.丙申正月萱謂子曰. “老夫新羅之季立後百濟名, 有年于今矣. 兵倍於北軍尚爾不利, 殆天假手為高麗. 盖歸順於北王保首領矣.” 其子神劒·龍劒·良劒等三人皆不應. "_삼국유사 일리천 전투 때 후백제는 무려 16만이나 척척 왔을수도 있음.  아니면 고려군에 맞 먹는 병력이 척척 왔을수도 있는 일이다. : 『고려사』 권 2 세가 2 태조 19년(936) 9월 갑오조를 보면 “장군 흔강(昕康)·견달(見達)·은술(殷述)·금식(今式)·우봉(又奉) 등 3,200명을 사로잡고 5,700명의 머리를 베니, 적병이 창을 거꾸로 돌려 저희들끼리 서로 싸웠다.  虜將軍昕康·見達·殷述·今式·又奉等三千二百人, 斬五千七百餘...

신라의 기원 진한辰韓에 대한 연구

이미지
신라의 기원 진한辰韓에 대한 연구  글쓴이 : 책사풍후 테마 음악 :   " 진한辰韓은 마한馬韓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진한辰韓의] 노인들은  대대代代로 전傳하여 말하기를, “[우리들은] 옛날의 망명인으로 진秦나라의 고역苦役를 피하여 한국韓國으로 왔는데,  마한馬韓이 그들의 동쪽 땅을 분할하여 우리에게 주었다.” 고 하였다. 그곳에는 성책城柵이 있다.註 176 그들의 말은 마한馬韓과 달라서 나라(國)를 방邦이라 하고, 활(弓)을 호弧라 하고  도적(적賊)을 구寇라 하고, 술잔을 돌리는 것(행주行酒)을 행상行觴이라 한다. 서로 부르는 것을 모두 도徒라 하여 진秦나라 사람들과 흡사하니, 단지 연燕나라·제齊나라의 명칭만은 아니었다. 낙랑樂浪 사람을 아잔阿殘이라 하였는데, 동방東方 사람들은 나(我)라는 말을 아阿라 하였으니, 낙랑인樂浪人들은 본디 그 중에 남아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지금도 [진한辰韓을] 진한秦韓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 [진한辰韓은] 처음에는 6국國이던 것이 차츰 12국國으로 나뉘어졌다. ○ 변진弁辰도 12국國으로 되어 있다. 또 여러 작은 별읍別邑이 있어서 제각기 거수渠帥가 있다. [그 중에서] 세력이 큰 사람은 신지臣智라 하고, 그 다음에는 험측險側이 있고, 다음에는 번예樊濊가 있고, 다음에는 살해殺奚가 있고, 다음에는 읍차邑借가 있다. 已柢國·不斯國·弁辰彌離彌凍國·弁辰接塗國·勤耆國·難彌離彌凍國·弁辰古資彌凍國·弁辰古淳是國·冉奚國·弁辰半路國·弁[辰]樂奴國·軍彌國(弁軍彌國)·弁辰彌烏邪馬國·如湛國·弁辰甘路國·戶路國·州鮮國(馬延國)·弁辰狗邪國·弁辰走漕馬國·弁辰安邪國(馬延國)·弁辰瀆盧國·斯盧國·優由國이 있어서, 변한弁韓과 진한辰韓의 합계가 24국國이나 된다. 대국大國은 4~5천 가家이고,  소국小國은 6~7백 가家로, 총 4~5만호萬戶이다. 그 중에서 12국國은 진왕辰王에게 신속臣屬되어 있다.註 177  진왕辰王은 항상 마한馬韓사람으로 왕王을 삼아 대대로 세습世襲하였으며,  진왕...

동아시아의 권력 투쟁_마한,동예,낙랑

 동아시아의 권력 투쟁_마한,동예,낙랑 //  ["[한나라 시즌2後漢의] 환제桓帝·영제靈帝 말기末期에는  한韓과 예濊가 강성하여 [한漢 왕조의] 군郡·현縣이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니,  [군현郡縣의] 많은 백성들이 한국韓國(=마한)으로 유입되었다. 건안建安 연간(A.D.196~220; 백제百濟 초고왕肖古王 31년~구수왕仇首王 7년)에  공손강公孫康이 (낙랑군의) 둔유현屯有縣 이남의 황무지를 분할하여  대방군帶方郡으로 만들고, 공손모公孫模·장창張敞 등을 파견하여  한漢나라의 흩어진 백성(遺民)을 모아 군대를 일으켜서 한韓과 예濊를 정벌하자,  [한韓·예濊에 있던] 옛 백성들이 차츰 돌아오고, 이 뒤에 왜倭와 한韓은 드디어 대방帶方에 복속되었다."_삼국지 동이전 마한편  ] "시간의 먼지를 털어내며, 아카이브의 깊은 층에서 찾아낸 문서 - 한나라, 후한의 마지막 단계, 환제와 영제가 정권을 잡고 있던 시기에 이르러, 그들의 팔로 자립한 두 힘세고 독립적인 영토, 한과 예를 통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한나라의 법적 구조 아래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떠나고, 새로운 터전, 한국(혹은 마한으로 불리는 곳)으로 향했다. 건안 연간(기원후 196~220년) 동안, 공손강은 낙랑군의 둔유현 이남의 황무지를 분할하여 대방군을 설립했다. 그는 공손모와 장창을 보내 한나라의 흩어진 백성들을 모아 군대를 조직하고 한과 예를 정벌하였다. 이는 공예에서 모래알로 바뀌어가는 시간의 유리병 같은 상황이었다. 그 결과, 오래전의 사람들, 분산된 한나라의 백성들이 점차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이 끝난 뒤에 왜와 한은 마침내 대방에 복속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마치 분산된 빛을 프리즘으로 모으는 것처럼, 대방군의 설립과 함께 분산되었던 한나라의 백성들이 다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한나라의 군대로 다시 모여들었고, 그 군대는 한과 예를 정복하며 한나라의 힘을 되찾았다. 그리고 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