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천 전투와 궁예가 벤 신라 왕 화상에 대한 연구

 일리천 전투와 궁예가 벤 신라 왕 화상에 대한 연구









글쓴이 : 책사풍후 


적벽대전,나가시노 전투 하면 오~ 거리는데. 일리천 전투 하면 그냥


애비 자식 사이 안 좋아서 분열난 불쌍한 후백제를 왕건이 견훤을 앞잡이로 해서 압도적 무력으로 밟아버린 사건


뭔가 엄청난 전투! 이런 이미지 보다는 그냥 후삼국 시대의 마지막 전투 때 고려의 ㅎㄷㄷ한 대규모 기병을 보여준 사건


그냥 이 정도로만 인식됨.


반도인 자체의 자국 역사 혐오와 사대주의 탓도 있지만


일리천 전투를 그림으로 남기지 않은 고려의 탓도 큼.




당시 기록을 보면 일리천 전투 때 백제의 군사력이 얼마나 되었는지는 안 적혀있으나


고려가 8만 5000의 대병력을 동원한 점 고려의 군사력의 상당수가 기병에 집중되어있는 점


신검 양검 용검 금강이 나란히 다 살아있을 때 견훤이 아들들한테 후백제의 군사력이 고려보다 2배로 많다고 언급한 점을 보면 




"병신년 정월에 견훤은 그 아들에게 말했다. “내가 신라 말에 후백제를 세운 지 여러 해가 되었다. 군사는 북쪽의 고려 군사보다 갑절이나 많으면서 오히려 이기지 못하니 필경 하늘이 고려를 도우는 것 같다. 어찌 북쪽 고려왕에게 귀순해서 생명을 보전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그 아들 신검(神劍)·용검(龍劍)·양검(良劍) 등 세 사람은 모두 응하지 않았다.丙申正月萱謂子曰. “老夫新羅之季立後百濟名, 有年于今矣. 兵倍於北軍尚爾不利, 殆天假手為高麗. 盖歸順於北王保首領矣.” 其子神劒·龍劒·良劒等三人皆不應. "_삼국유사


일리천 전투 때 후백제는 무려 16만이나 척척 왔을수도 있음. 


아니면 고려군에 맞 먹는 병력이 척척 왔을수도 있는 일이다.




: 『고려사』 권 2 세가 2 태조 19년(936) 9월 갑오조를 보면 “장군 흔강(昕康)·견달(見達)·은술(殷述)·금식(今式)·우봉(又奉) 등 3,200명을 사로잡고 5,700명의 머리를 베니, 적병이 창을 거꾸로 돌려 저희들끼리 서로 싸웠다.  虜將軍昕康·見達·殷述·今式·又奉等三千二百人, 斬五千七百餘級. 賊倒戈相攻.  ”라고 적혀있는데.


매우 충격적 기록이다. 장군 흔강 견달 은술 금식 우봉 등 3200명을 사로잡았다....


계속 되는 기록을 보면  "해당 관청[攸司]에 명하여 사로잡은 후백제의 장사(將士) 3,200인을 아울러 원래 고향으로 돌려보냈으나 오직 흔강·부달(富達)·우봉·견달 등 40인만은 그들의 처자와 함께 개경(開京)으로 보내었다. 命攸司虜獲百濟將士三千二百人, 並還本土, 唯昕康·富達·又奉·見達等四十人幷妻子, 送至京師. "라고


적고있는데. '장사將士'라고 적고 있다. 


장사 그랬다 그랬던 것이었다.


무려 장교들이 3200명에 달했다고 볼수도 있는 기록이다.


혹은 정예병에 해당하는 자가 3200명이고 나머지는 싸그리 징집 노예들이었을수도.




일리천 전투는 고려측에선 견훤을 앞세워서 아비를 몰아낸 불효한 자식 신검이 다스리는 후백제를 토벌하는 의로운 전쟁이었다.


그런데 "5,700명의 머리를 베었다."


그냥 죽이기만 하지. 참수하는 대학살을 했다. 그것도 장교가 아니라 무려 5700명에 달하는 죄 없는 징집노예들을.




왕건은 황산벌에서 신검의 항복을 받았다. 근데 신검 용검 양검 살려준다고 하고선 얼마 안가 모조리 죽였다.


삼국사기 견훤전을 보면 "견훤은 근심하고 번민하다가 등창이 나서 수일 만에 황산의 절에서 죽었다."고 적혀있다.


왜 근심하고 번민했을까? 왕건이 신검을 살려준다고하니 그것 때문에 근심? 번민? 견훤 정도 사람이면 왕건의 정치력과 간교함을 모를까?


근심하고 번민했다.. 후백제 남자 5700명이 푹푹 목이 잘리는 광경을 본 견훤은 그 직후 이용 가치가 떨어져서 황산의 절로 끌려가고 


신검 양검 용검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수도 없는 밀폐된 상황에서 등창 관리해주던 무료 의사들도 다 거두어지니


몇일만에 죽은게 아닐까. 






"태조가 군령을 엄격하고 명백히 하니 사졸들이 조금도〔백성의 재산을〕 범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주(州)와 현(縣)은 안도하였고, 노인과 어린이 모두가 만세를 불렀다. 이에〔백제의〕 장사(將士)들을 찾아가 사정을 알아보고, 재능을 헤아려 임용하니 백성들도 저마다 그 직업을 편안히 하였다."_삼국사기 견훤전




이것은 삼국사기 견훤전의 기록이다.


일리천 전투 후 왕건은 황산벌에서 신검,능환 등 후백제 패배자들의 항복을 받고 


바로 후백제 도성으로 들어왔다. 이 때 노인,어린이 모두가 만세를 불렀다는데.


노인,어린이 모두가.... 


이건 어쩌면 후백제 도성엔 노인,어린이 빼고는 성인 남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던 상황일수있다.


(이미 대부분 전쟁터로 끌려갔으니까)


그냥 무혈입성을 해버렸다. 이는 왕건의 사전 공작에 의해 후백제 도성 안에서 반란이 일어나서 이미 완전히 장악되어서 왕건을 향해 성문이 활짝


열려있었을수도 있다.


왕건이 후백제 도성에 입성했을 때 백제의 또 다른 장사(將士)라는 자들이 왕건의 방문을 받고, 왕건에게 임용되었다.


이 장사(將士)라는 자들은 후백제 도성을 접수하는데 성공한 반란군들이었을수있다.


다음 기록을 보면 견훤의 사위 박영규가 주동자였음을 알 수 있다. 




"견훤의 사위인 장군 영규(英規)註 001가 그의 부인에게 은밀히 말하기를, “대왕께서 부지런히 힘쓰신 지 40여 년에 큰 공이 거의 이루어졌는데, 하루아침에 집안사람들의 화로 인하여 설 땅을 잃고 고려에 투항하셨소. 대저 정조가 있는 여자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고,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법이오. 만약 자기의 임금을 버리고 반역한 아들을 섬긴다면 무슨 얼굴로 천하의 의로운 선비들을 보겠소? 하물며 듣자니 고려의 왕공(王公)께서는 마음이 어질고 후하며 근면하고 검소하여 민심을 얻었다고 하니 대개 하늘의 계시인 듯하오. 반드시 삼한(三韓)註 002의 주인이 될 것이니 어찌 편지를 보내 우리 왕을 문안, 위로하고 겸하여 왕공에게 겸손하고 정중함을 보여 장래의 복을 도모하지 않겠소?”라고 하였다. 그 아내가 말하기를, “당신의 말이 곧 내 뜻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천복(天福)註 003 원년(936) 2월에 사람을 시켜 뜻을 전달하였는데, 드디어 태조에게 고하기를, “만약 정의로운 깃발을 드신다면 내응하여 왕의 군대를 맞이하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태조가 크게 기뻐하여 그 사신에게 후하게 물건을 주어 보내고, 겸하여 영규에게 사례하여 말하기를, “만약〔그대의〕은혜를 입어 하나로〔힘을〕 합쳐 길이 통하지 않음이 없어진다면 먼저 장군을 찾아뵙고,〔그런〕 후에 마루에 올라 부인에게 절하고, 형으로 섬기고 누나로 받들겠으며 반드시 끝내 후하게 보답하겠습니다. 하늘과 땅의 귀신이 모두 이 말을 들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 〔태조가〕영규註 001에게 이르기를, “전왕(前王)이 나라를 잃은 후에 그 신하들로서 한 사람도 위로하고 돕는 자가 없었는데 오직 그대의 부부가 천 리 밖에서 소식을 전하여 성의를 다하였고, 겸하여 과인에게 아름다운 이름이 돌아가게 하였으니[歸美]註 002 그 의로움을 잊을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이에 좌승(佐丞)註 003의 직위를 주고 밭(田) 1,000경(頃)註 004을 하사하였다. 역마(驛馬)註 005 35필을 빌려주어 집안사람들을 맞이하게 허락하였고, 그의 두 아들에게도 관직을 하사하였다. 


"_삼국사기 견훤전






견훤 덕에 후백제를 멸망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사관 김부식은 삼국사기 견훤전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논하여 말한다. 신라는 운수가 다하고 도(道)가 사라져 하늘이 돕는 바가 없고 백성이 돌아갈 바가 없었다. 이에 떼도적들이 틈을 타서 일어났는데, 마치 고슴도치 털과 같이 많았다. 그중에 심한 자는 궁예와 견훤 두 사람뿐이었다. 궁예는 본래 신라의 왕자였으나註 001 도리어 종국(宗國)을 원수로 삼아 그를 멸망시키려고 하여 선조의 화상을 칼로 베기까지 하였으니註 002 그 어질지 못함이 심하였다. 견훤은 신라의 백성에서 출세하여 신라의 관록을 먹었으면서도註 003 반역의 마음을 품고[包藏禍心]註 004 나라의 위기를 다행으로 여겨 도읍을 침범하여 임금과 신하를 도륙하기를 마치 새를 잡듯이, 풀을 베듯이 하였으니註 005 실로 천하에서 가장 흉악한 자[元惡大憝]註 006였다. 그러므로 궁예가 그 신하들로부터 버림받았고, 견훤은 그 자식에게서 재앙이 생겨난 것은 모두 자초한 것이니 또 누구를 탓하겠는가? 비록 항우(項羽)註 007와 이밀(李密)註 008과 같은 영웅과 재사(才士)도 한(漢)과 당(唐)의 일어남을 대적할 수 없었는데 하물며 궁예와 견훤와 같은 흉악한 자들이 어찌 우리 태조와 서로 겨룰 수 있겠는가? 단지 그〔태조〕를 위해 백성을 몰아다 준 자들[歐民者]註 009이었다."_삼국사기 견훤전




그냥 대놓고 견훤= 병신 궁예와 마찬가지로 우리 태조왕건에게 백성 몰아다 준 흉악한 병신 ㅋㅋ 라고 적었다.




견훤은 걍 이용감에 불과하다. 이용가치가 떨어지자 귀찮은 고슴도치 취급을 받았다.




이건 갑자기 다른 얘기인데. 위 삼국사기 견훤전의 기록에 "弓裔夲新羅王子, 而反以宗國爲讎, 圖夷㓕之, 至斬先祖之畫像, 其爲不仁甚矣."라고 적혀있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보통 궁예가 부석사에 걸린 신라 왕의 화상을 칼로 베었다는걸 궁예가 지 아비의 화상을 칼로 벤거라고 막연히들 상상하는데.


기록엔 그 화상이 궁예의 아비의 화상이란 말은 없고 단지 신라 왕의 화상이라고 되어있을 뿐이다.


그런데 삼국사기,삼국유사 모두 다 그걸 '선조(先祖)의 화상'이라고 적고 있다.


 


선조(先祖)란다. 선조.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이 세운 절이다.


궁예는 신라가 당나라 끌어들여 고구려 멸망시킨 원수를 갚겠다고 선언하고 신라를 멸해야할 도읍 '멸도滅都'라고 부른 바가 있다.


왜 멸국이 아니라 멸도인가. 궁예는 신라 왕자이기 때문이다. 


궁예가 수많은 호족들의 무혈항복을 받아낼 수 있던 것도 궁예가 자신의 그런 신분을 대외에 공표해서였을 가능성이 있다.


신라 왕자가 살기 힘들어 도적이 되어버린 백성들을 위해 반란군 대장이 기꺼이 되고 , 고구려 유민 출신 호족들에게는 고구려의 원수를 갚겠다고 말하니 


그런 상황에서 궁예가 신라를 멸국이 아니라 멸도라고 부른 것은 자못 상징성이 크다.




그렇다면 궁예가 부석사로 순행했을 때 베어버린 신라 왕의 화상은 궁예의 아비의 화상이라기보단 부석사를 세운 신라 문무왕의 화상이란 것이


더 그럴싸해보이며, 궁예가 당나라를 끌어들여 고구려 멸망시킨 신라에 대해 보복하겠다고 선언한 점을 볼 때


그 보복받을 행위를 한 당사자인 신라 문무왕의 화상을 베어버렸다는 것이 더 맞다고 보이겠다.


'선조(先祖)의 화상'이란 말이 바로 그런 추정을 더 굳히게 하는 요소이다.


궁예는 신라 왕자이니, 문무왕은 궁예에겐 선조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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