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전쟁의 기원 브루스 커밍스 김자동 옮김 책 일부 필기 231230

책사풍후의 '한국의 전쟁의 기원 브루스 커밍스 김자동 옮김 책 일부 필기


===테마 음악=======================

https://youtu.be/CC8fv91InEs?si=fOzplDmG1xw_6C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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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첫해 동안의 북한에서의 변화가 급격했던 것은 남부에 대한 ‘전시적 효과’를 노렸기 때문이기도 했다.


식민 잔재의 능률적이며 철저한 청산의 인상은 남부의 정체와 폭력에 대한 대조를 이루고자 했기 때문이며,


실제로 대조가 되었던 것이다.


북쪽바람은 계속 남하하는 난민들에 의하여 실려 왔으며 이들은 더 이상의 불안을 야기하는 효과를 지녔기 때문에 남부에 있어서 북한측의 트로이 목마 역할을 하였다.


1945년 가을부터 남한의 신문들은 자주 북한의 변화에 관해 보도하였다. 


좌익뿐만 아니라 온건파 신문들도 각종 개혁을 찬양했으며, 일반적으로 우익 신문들이 게재한 만행과 약탈의 보도를 


일소에 붙였다. 


[근역주보]가 북한의 정책을 남한과 대조시킨 표본적 실례를 제공했다. 




“소련군의 정책은 미군과 다르다. 소련군은 북한에 진주하자 즉시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시켰으며 


일본인들의 좋은 의복을 벗기고….


일인 소유 주택을 집 없는 한인들에게 주고, 그들의 재산을 한인들에게 주고,


정치 및 경제적 권력을 완전히 조선인민의 수중으로 넘겨주었다.”_[근역槿域) 주보], 1945년 11월 26일자에 기고한 안기성의 글.




북한 주재 소련 사령부의 역할이 어떠했던간에 북한측은 남한사람들로 하여금 인민위원회가 능률적인 통치기구라는 것을 믿게 했다.


예를 들어 온악중은 북한 어디를 여행하든지 인민위원회의 간판을 볼 수 있으며


그것은 “인민 자신의 손으로 만든” 정부의 “:새로운 형태”라고 서술했다. 


이것은 “인민에 의한,인민을 위한” 정부라는 것이었다. (G-2 “Weekly Report,” 제37호, 1946년 3월 10~17일.)




우익 소식통까지도 북한이 단순히 인민위원회의 치하에 있다고 설명했다.


1946년 3월의 북한 토치개혁은 남부에 특히 강한 충격을 주었다. 


발표가 있은 후, 남한의 신문들은 이를 톱 기사로 보도했으며,


사설들은 남부에서도 유사한 개혁을 할 것을 주장했고 비판은 거의 없었다.([Seoul Times], 1947년 11월 21일자)




그 후 북한과 같은 토치개혁을 요구하는 시위가 남부 각도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났다.


당시 남한 신문들을 숙독하면 한국의 추진력은 북으로부터 나오고 있다는 남부인들의 생각이 얼마나 강했는가를 알 수 있다.


첫해 동안 남한은 북으로부터 거대한 피난민 행렬을 받아 들였다.


미 점령당국은 이들을 공산주의 및 소련통치로부터의 피난민들이라고 불렀으나


행렬은 그보다 더 복잡한 것이었다.


주한 미 군정청 외무국의 이 문제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 1945년 11월에 미국 기자 Robert P. Martin은 남으로 내려오는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북으로 갔다고 보도했다.(New York Post, 1945년 11월 20일자) 1945~1946년의 미국 정보 보고들은 북을 향한 이동의 산발적 증거를 제시했으나 수자는 열거되지 않았다.


1940년대 말기에 일본으로부터 약 37만명의 한인이 북한으로 이주했는데 그 중에는 남부 출신의 농민과 노동자들도 있었다.


이것은 아마도 사회주의 국가로 자진이주한 최대의 집단일 것이다.


1959년 이후에도 수십만의 한인들이 일본으로부터 북한으로 이주했다.  )




1945~1946년 가을과 겨울 사이에 남한으로 몰려온 피난민 중 대다수는 만주 및 북한으로부터 남한의 고향으로 돌아오는 사람이었다. 


1946년 봄에는 토치개혁과 기타 조치들이 보다 상류계급에 속하는 피난민의 흐름을 자극하였다.


그 후 수개월 동안의 유입인구는 주로 교육을 잘 받은 부류 —-지주,상인,의사,변호사,기술자,교원 및 정부 관리들이었다.


1946년 봄에 정점에 오른 후 흐름은 줄어들었으며 다시 보다 복합적인 계급 구성을 이루게 되었다.


한편 계절적 흐름도 있었다.


북한의 농업조건이나 식량사정이 나쁜 달에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남쪽으로 내려왔다.


비록 남한 출신은 적었으나, 수십만의 한인들이 일본을 떠나 북한으로 갔다.


그리하여 어느 정도 까지는 한국의 계급들이 남.북이라는 기초 위에 재집결했던 것이다.


북한은 남부로의 인구 이동이 남한에 불안을 조장하기 때문에 이를 고무하였다.


첫째로, 귀환하는 실향민들이 남부의 식량 공급 및 구호설비에 압박을 가했으며 


불만에 차 있는 하층무산계급을 남부에 정착시킨 것이다. 


앞서 보았듯이 뿌리를 상실한 이주민들이 지방의 소요에 크게 작용하였다.


둘째로, 북한 측은 지주들의 남하를 허용함으로써 토치 개혁 후 북한에 존재한 적대적이며 기초를 상실한 지주 계급을 다루는 귀찮은 문제를 피하는 한편,ㅡ 역시 불만에 차 있으며 재산을 상실한 상류계층을 남한에 정착시킨 것이다. 


과거 식민시대의 경찰 및 관리를 포함한 이러한 북한 주민들의 남하는 남부에서 양극화 작용을


했다. 이것은 중도화의 가능성을 밀어냈으며 미국인들로 하여금 공산주의와 반동 중 하나를 택하게


만들었다.


북한은 물론 이러한 결과를 환영하였다.


최소한, 허술한 경계선 때문에 그들의 급진적 개혁이 약속한 최종적 결산을 연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남으로의 유동 덕택에 북한측은 첩자를 피난민의 무리 사이에 끼어넣을 수 있었으며이는 미 군정과 남한 경찰들의 계속적 걱정거리가 되었다. 


_523~52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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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의 해방 후 첫해의 결산은 분명히 긍정적인 편이다.


한국전쟁 중 북한 출신 포로 및 난민들에 대한 광범한 설문에 토대를 둔 한 미국측 연구는 정보제공자들이 북한의 관리와 경찰은


“과거의 정부에 비하여 덜 잔인하고…. 관리들은 열성적이고, 능률적이고, 정직한 인상을 주었다.”고 


믿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함흥에서 온 한 재단사는 “노동자와 무식한 자들이 집권했다”라고 말했으며


다른 사람들은 변화의 정도가 충격적인 것을 발견했다.




[농군들,이혼녀들, 그리고 당원들이 설치면서 마을을 지배했다 ….


배우지 못한 자, 일본 통치 하의 하인들, 해방 후 출옥한 자들이 새 지도자가 되었다.]




원산의 한 회사 경영자는 이렇게 말했다. 




[시의 지도자들은 농군과 노동자였다. 그들은 한글과 한자를 열심히 배웠으며 


어느새 마음속에 공산주의를 뿌리박게 되었다. 이런 무식한 사람들이 아는 척 하게 된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남한에 거주했던 어느 남한 출신 교육자는 “공산주의자들이 한 일 중에 가장 잘한 것은 …




하층계급의 어린이들이 학교에 갈 수 있도록 한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정보제공자들은 일반적으로 노동자의 지위가 크게 향상되어 “처음으로 노동자들이 정치의 


상층부까지 오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는데 


동의했다.


여성도 그러했다. 인민위원회마다 적어도 여자 한 명을 위원으로 뽑는 것이 상례였다.


그리하여 1946년 말에 이르면 북부는 계속된 정체와 폭력에 휩싸인 남한에 무서운 위협이 되었다.


날이 갈수록 북쪽의 바람은 더욱 거세게 부는 것 같았다. 


(심리전 연구보고 제 1호인 A Preliminary Study of the Impact of Com-munism Upon Korea에 


실린 “Notes on the Pattern of Sovietization on North Korea” 


(Maxwell AFB, Ala,: Air UNIVERSITY hUMAN rESOURCES rESEARCH iNSTITUTION, 1951), pp. 207~209, 214, 224~225, 247, 254. 이것은 북한 출신 포로 및 피난민 200명과의 


인터뷰를 근거로 하여 작성된 것이다. _526p








다 읽어보고 내 생각을 조금 곁들여 요약 : 




1. 북한에서 지주들이 인민재판으로 학살당했다는건 과장인거 같다.


 2. 북한의 못 살고 불평 불만이 가득한 사람들이 남한으로 대거 내려와서 오늘날 노무현 문재인 이재명 지지자들의 DNA 기초를 형성했다.


그리고 이런 북한의 빈민들의 대거 남하는 남조선의 식량과 구호 설비의 과부하를


일으켰다. 


3. 북한은 지주들과 과거 친일 관료 층을 안 죽이고 땅과 재산만 뺏고 남한으로 추방시켰다.


 그리고 이 거대한 출애굽 행렬 속에 스파이들을 끼워넣었다.


4. 1번에서 3번의 행동들의 결과로 결국 남조선을 다스리는 미군정은 북한을 상대로 반공 정책을 취한다. 북한은 이런 결과를 환영했다. 


자신들이 남조선을 침략시킬 명분을 더욱 더 가질 수 있게 되니까.


5. 흉폭하고 무식한 자들과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들이 정치가 뭔지 국제 관계가 뭔지


외교가 뭔지 영어가 뭔지 러시아어가 뭔지 역사가 뭔지 고대사가 뭔지 일본이 왜 대단한지 하나도 알지 못하는 주제에 한자 한글 공부하고 아는체하며 북한의 지배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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