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는 중)삼국지 위서 무제기의 진동장군에 대한 검토

삼국지 위서 무제기의 진동장군에 대한 검토


글쓴이 : 책사풍후 


다음은 삼국지 위서 무제기 즉 삼국지 조조전의 기록이다.

조조는 서기 196년 봄 정월 한나라 황제를 구출했다.

당시 한나라 황제는 사실상 전국을 통제하는 실권이 사라졌으나 아직 그 상징성은

충분히 있었고 전국의 호족들을 움직일 수 있는 거대한 명분 카드였고 

이용 가치가 많았다. 

조조의 책사인 순욱,정욱은 황제를 잡아야한다고 말했고 조조는 이를 따랐다.

그 후 한나라 황제는 조조 덕분에 구출되어 이리 저리 떠돌던 황제의 인생은

비로소 안정 기로에 접어 든다.

황제는 서기 196년 여름 6월 조조를 '진동장군(鎭東將軍)'으로 

임명했다. 이것은 황제의 결정이 아니라 조조의 요청에 따른 황제의 임명으로 봐야 될 듯하다. 

 '진동장군(鎭東將軍)'이란 관직은 고대 중국의 '사진장군(四镇将军)' 제도는 한나라와 

위진남북조 시대에 걸쳐 등장한 것으로, 중국 고대의 고위 무관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 

이들은 주로 국가의 주요 방위를 담당하며, 동서남북의 주요 지역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四镇将军'은 특정 지역의 군사적 방어와 지역 안정을 책임지는 고위직 군사 지휘관으로, 황제의 중앙 정부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으면서 지방의 안보를 담당했다.  

조조는 이 진동장군이란 관직을 통해 중국의 동부 지역인 산동반도,하남성 등지를 

자신의 영역으로 만들려고 한 듯 하다. 

서기 12세기 후반에 일본 사무라이 '미나모토 요리토모'가 타이라 가문의 전횡과 무단적 횡포로부터 일본 황제를 구출해준 후, 일본 황제를 대신해 일본열도의 동부 지역을 다스리는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으로 임명된 거랑 비슷한 느낌이다.

진동장군 , 정이대장군은 관직 이름은 다르고 관직의 성격도 다소 다르고 

관직이 등장하게된 역사적 성격 역시 다르지만 

황제를 대신해 어떤 지역을 다스린다는 점에서 비슷하고

둘 다 고대 중국의 황제국 정치 군사 제도의 영향 하에서 등장했다는 점에서

서로 약간 유사한 성격을 보이고 있다.


미나모토 요리토모도 겉으로는 황제의 통제 아래에 있는 신하다. 조조 역시 황제의 통제 아래에 있는 신하다. 그러나 사실 둘 다 실제 권력자이고 황제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미나모토 요리토모와 조조 모두 겉으로는 각자의 시대와 국가에서 황제의 통제 아래에 있는 신하의 위치에 있었지만, 실제로는 각각의 정치적 상황에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주체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두 인물이 활동했던 역사적 맥락과 정치적 구조 속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조조의 경우: 중국의 후한 말기는 중앙 집권적인 황제 권력이 약화되고 전국적으로 분열과 혼란이 일어나던 시기였습니다. 조조는 황제를 '구출'함으로써 명목상으로는 황제의 명령을 따르는 신하의 역할을 수행했지만, 실제로는 황제를 자신의 통제 하에 두고 중앙 정부의 권력을 사실상 장악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군사적, 정치적 기반을 활용하여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했고, 황제는 주로 상징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허수아비로 전락했습니다.


미나모토 요리토모의 경우: 일본의 경우, 겐페이 전쟁 이후 요리토모가 '정이대장군'으로 임명되면서 실질적인 권력을 확보하게 됩니다. 요리토모는 황제에 의해 임명되긴 했지만, 실제로는 일본 열도의 광범위한 영토를 통제하며 독자적인 정치 체제인 막부를 설립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천황은 주로 상징적인 지위를 유지하면서 실질적인 정치적 권력은 요리토모와 그의 후계자들이 행사했습니다.


두 경우 모두, 황제는 전통적인 권위와 상징성을 유지하며 정당성의 근원으로 작용했지만, 실질적인 정치적, 군사적 결정은 조조와 요리토모와 같은 권력자들이 담당했습니다. 이는 당시의 정치적 불안정과 권력 구조의 변화가 황제의 실질적인 권력 약화와 함께 신하들이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상황으로 이어졌음을 보여줍니다.


조조의 군사 권력도 학술적 개념으로 말하면 조조 역시 막부를 세웠다고 볼 수 있다.


조조의 군사 권력과 행정 체제를 '막부'와 비교하는 것은 흥미로운 관점입니다. 


일반적 인식으로는 막부 제도는 일본에서 최초로 탄생한 것처럼 여겨진다.

'막부'는 일본에서 사무라이 정권이나 군사정부를 의미합니다. 

이 체제는 미나모토 요리토모에 의해 처음 설립되었으며, 그 이후 일본 역사상 여러 시대에 걸쳐 존재했습니다. 막부 정부는 천황으로부터 정치적 권위를 부여받았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쇼군(막부의 지도자)과 그의 사무라이 관료들이 행사했습니다. 막부는 일본의 중앙집권적인 군사 행정 체계를 의미하며, 천황은 상징적인 지위를 유지했다.


반면 삼국지 시대의 조조는 중국 후한 말기의 혼란을 배경으로 자신의 권력을 확립했습니다. 그는 황제로부터 군사적인 임무와 권한을 부여받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군사력과 정치적 영향력을 바탕으로 중앙 권력을 사실상 통제했습니다. 조조는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지역을 직접 관리하며, 중앙집권적인 통치 체계를 구축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조조의 체제는 전통적인 중국 황제 체제 내에서 활동하는 것이었고, 황제의 권위 아래에서 행동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조조가 자신의 영역 내에서 실질적인 군사적 및 행정적 권력을 행사했다는 점에서, 그의 체제는 일종의 군사적 통치 체계를 구축했다고 볼 수 있다.

고로 일본의 막부 제도와 묘한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일본의 막부 제도는 일본 사무라이,일본 민족의 독창적인 발명일까

아니면 중국에서 기원한 것인가?


중국의 정치 체계는 전통적으로 중앙집권적인 황제제도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중국의 황제는 '천자'라 불리며, 천하의 최고 통치자로 간주되었습니다. 중국의 행정 체계, 법률, 문화 등은 많은 동아시아 국가들에 큰 영향을 미쳤고, 일본 역시 중국의 문화, 법률, 철학 등을 도입하여 자신들의 사회에 적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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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안 원년(196년) 봄 정월, 태조군이 무평(武平-예주 진국 무평현)에 임하자 원술이 임명한 진상(陳相-진국의 국상) 원사(袁嗣)가 항복했다. 태조가 장차 천자를 영접하려 하자 제장들 중에 간혹 의심하는(반대하는) 자가 있었으나, 순욱, 정욱이 권하자 조홍(曹洪)을 보내 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천자를 영접하도록 했다. (그러나) 위장군(衛將軍) 동승(董承)이 원술의 장수 장노(萇奴)와 함께 험준한 곳을 막고 있었으므로 조홍은 진군할 수 없었다.

여남과 영천의 황건적 하의(何儀), 유벽(劉辟), 황소(黃邵), 하만(何曼) 등은 각각 그 무리가 수만에 이르렀는데, 처음에 원술에 호응했다가 다시 손견에 붙었었다. 2월, 태조가 진군하여 이를 토파(討破)하고 유벽, 황소 등을 참수하자 하의의 무리가 모두 투항했다. 천자가 태조를 건덕장군(建德將軍)으로 임명했다.

여름 6월, 진동장군(鎭東將軍)으로 승진하고 비정후(費亭侯)에 봉해졌다. "

_삼국지 위서 무제기




===삼국지 위서 무제기===============

건안 원년(196년) 봄 정월, 태조군이 무평(武平-예주 진국 무평현)에 임하자 원술이 임명한 진상(陳相-진국의 국상) 원사(袁嗣)가 항복했다. 
 
태조가 장차 천자를 영접하려 하자 제장들 중에 간혹 의심하는(반대하는) 자가 있었으나, 순욱, 정욱이 권하자 조홍(曹洪)을 보내 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천자를 영접하도록 했다. (그러나) 위장군(衛將軍) 동승(董承)이 원술의 장수 장노(萇奴)와 함께 험준한 곳을 막고 있었으므로 조홍은 진군할 수 없었다.
 
여남과 영천의 황건적 하의(何儀), 유벽(劉辟), 황소(黃邵), 하만(何曼) 등은 각각 그 무리가 수만에 이르렀는데, 처음에 원술에 호응했다가 다시 손견에 붙었었다. 2월, 태조가 진군하여 이를 토파(討破)하고 유벽, 황소 등을 참수하자 하의의 무리가 모두 투항했다. 천자가 태조를 건덕장군(建德將軍)으로 임명했다.
 
(※ 유벽(劉辟)을 참수했다고 하나 유벽은 이후 건안 5년 기사에도 버젓이 등장합니다. <연의>에서처럼 관도전투 때 원소에 호응해 유비와 함께 조조의 후방을 괴롭히죠. 혹 동명이인일 수도 있으나 활동 지역이나 행적이 서로 일치하는 것으로 볼 때 그렇지는 않은 것 같고 이 기사 글자의 오류로 생각됩니다)
 
여름 6월, 진동장군(鎭東將軍)으로 승진하고 비정후(費亭侯)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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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삼국지 위서 무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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