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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사풍후의 패수(浿水)의 위치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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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사풍후의 패수(浿水)의 위치 연구 패수(浿水)의 위치 사마천의 '사기'의 조선전을 보면 한나라 침공군 중 육군 5만은 요동을 떠나 패수(浿水)로 돌격한다. 그때 패수의 서쪽엔 위만조선 육군이 주둔하고 한나라 육군을 참패시킨다. 한나라 수군 7천은 산동반도에서 바로 바다를 건너 위만조선의 수도 왕험성 근처 '열구'에 상륙한다. '열구'는 '열수'란 강물의 하구다. 바로 왕험성으로 개돌하려다가 우거왕이 바로 뛰쳐나와서 쳐발라버리니 한나라 수군은 사방으로 흩어져버렸다.  근데 결국 패수 서쪽 혹은 패수 위에 주둔하던 위만조선 육군은 한나라군의 인해전술에 쳐발리고 왕험성으로 퇴각한다. 한나라 육군은 패수를 건너 바로 왕험성에 당도한다. 사기 조선전 기록을 보면 위만조선의 수도 왕험성은 해변가 가까이 있고, 패수로부터 얼마 안되는 거리에 있고, 패수 근처에 '요동'이란 땅 혹은 한나라의 식민지 요동군의 한 마을이 있을 수 있다. 왕험성과 패수 사이에는 또 다른 강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어쩌면 왕험성은 강으로 둘러싸인 섬같은 지형일수도 있다. 그리고 왕험성 근처엔 '열수'란 강물의 '하구'가 있다. // 1. 위만조선의 수도 왕험성은 해변가 가까이 있고, 패수로부터 얼마 안되는 거리에 있고, 2. 패수 근처에 '요동'이란 땅 혹은 한나라의 식민지 요동군의 한 마을이 있을 수 있다. 3. 왕험성과 패수 사이에는 또 다른 강이 없음을 알 수 있다. 4. 어쩌면 왕험성은 강으로 둘러싸인 섬같은 지형일수도 있다. 5. 그리고 왕험성 근처엔 '열수'란 강물의 '하구'가 있다. // 그런데 이런 정리를 헷갈리게하는 사료가 있다. 낙랑군 누방현에서 흘러나와 동남쪽으로 흘러 임패현을 지나 바다에 빠지는 패수浿水(수경,설문해자) 수경과 설문해자의 기록이 그것인데. 수경은 서기 5세기 때의 기록이라서 낙랑군이 요서,베이징으로 이사간 당시의

일리천 전투와 궁예가 벤 신라 왕 화상에 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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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리천 전투와 궁예가 벤 신라 왕 화상에 대한 연구 글쓴이 : 책사풍후  적벽대전,나가시노 전투 하면 오~ 거리는데. 일리천 전투 하면 그냥 애비 자식 사이 안 좋아서 분열난 불쌍한 후백제를 왕건이 견훤을 앞잡이로 해서 압도적 무력으로 밟아버린 사건 뭔가 엄청난 전투! 이런 이미지 보다는 그냥 후삼국 시대의 마지막 전투 때 고려의 ㅎㄷㄷ한 대규모 기병을 보여준 사건 그냥 이 정도로만 인식됨. 반도인 자체의 자국 역사 혐오와 사대주의 탓도 있지만 일리천 전투를 그림으로 남기지 않은 고려의 탓도 큼. 당시 기록을 보면 일리천 전투 때 백제의 군사력이 얼마나 되었는지는 안 적혀있으나 고려가 8만 5000의 대병력을 동원한 점 고려의 군사력의 상당수가 기병에 집중되어있는 점 신검 양검 용검 금강이 나란히 다 살아있을 때 견훤이 아들들한테 후백제의 군사력이 고려보다 2배로 많다고 언급한 점을 보면  "병신년 정월에 견훤은 그 아들에게 말했다. “내가 신라 말에 후백제를 세운 지 여러 해가 되었다. 군사는 북쪽의 고려 군사보다 갑절이나 많으면서 오히려 이기지 못하니 필경 하늘이 고려를 도우는 것 같다. 어찌 북쪽 고려왕에게 귀순해서 생명을 보전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그 아들 신검(神劍)·용검(龍劍)·양검(良劍) 등 세 사람은 모두 응하지 않았다.丙申正月萱謂子曰. “老夫新羅之季立後百濟名, 有年于今矣. 兵倍於北軍尚爾不利, 殆天假手為高麗. 盖歸順於北王保首領矣.” 其子神劒·龍劒·良劒等三人皆不應. "_삼국유사 일리천 전투 때 후백제는 무려 16만이나 척척 왔을수도 있음.  아니면 고려군에 맞 먹는 병력이 척척 왔을수도 있는 일이다. : 『고려사』 권 2 세가 2 태조 19년(936) 9월 갑오조를 보면 “장군 흔강(昕康)·견달(見達)·은술(殷述)·금식(今式)·우봉(又奉) 등 3,200명을 사로잡고 5,700명의 머리를 베니, 적병이 창을 거꾸로 돌려 저희들끼리 서로 싸웠다.  虜將軍昕康·見達·殷述·今式·又奉等三千二百人, 斬五千七百餘級. 賊倒戈相攻.  ”라고

신라의 기원 진한辰韓에 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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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기원 진한辰韓에 대한 연구  글쓴이 : 책사풍후 테마 음악 :   " 진한辰韓은 마한馬韓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진한辰韓의] 노인들은  대대代代로 전傳하여 말하기를, “[우리들은] 옛날의 망명인으로 진秦나라의 고역苦役를 피하여 한국韓國으로 왔는데,  마한馬韓이 그들의 동쪽 땅을 분할하여 우리에게 주었다.” 고 하였다. 그곳에는 성책城柵이 있다.註 176 그들의 말은 마한馬韓과 달라서 나라(國)를 방邦이라 하고, 활(弓)을 호弧라 하고  도적(적賊)을 구寇라 하고, 술잔을 돌리는 것(행주行酒)을 행상行觴이라 한다. 서로 부르는 것을 모두 도徒라 하여 진秦나라 사람들과 흡사하니, 단지 연燕나라·제齊나라의 명칭만은 아니었다. 낙랑樂浪 사람을 아잔阿殘이라 하였는데, 동방東方 사람들은 나(我)라는 말을 아阿라 하였으니, 낙랑인樂浪人들은 본디 그 중에 남아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지금도 [진한辰韓을] 진한秦韓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 [진한辰韓은] 처음에는 6국國이던 것이 차츰 12국國으로 나뉘어졌다. ○ 변진弁辰도 12국國으로 되어 있다. 또 여러 작은 별읍別邑이 있어서 제각기 거수渠帥가 있다. [그 중에서] 세력이 큰 사람은 신지臣智라 하고, 그 다음에는 험측險側이 있고, 다음에는 번예樊濊가 있고, 다음에는 살해殺奚가 있고, 다음에는 읍차邑借가 있다. 已柢國·不斯國·弁辰彌離彌凍國·弁辰接塗國·勤耆國·難彌離彌凍國·弁辰古資彌凍國·弁辰古淳是國·冉奚國·弁辰半路國·弁[辰]樂奴國·軍彌國(弁軍彌國)·弁辰彌烏邪馬國·如湛國·弁辰甘路國·戶路國·州鮮國(馬延國)·弁辰狗邪國·弁辰走漕馬國·弁辰安邪國(馬延國)·弁辰瀆盧國·斯盧國·優由國이 있어서, 변한弁韓과 진한辰韓의 합계가 24국國이나 된다. 대국大國은 4~5천 가家이고,  소국小國은 6~7백 가家로, 총 4~5만호萬戶이다. 그 중에서 12국國은 진왕辰王에게 신속臣屬되어 있다.註 177  진왕辰王은 항상 마한馬韓사람으로 왕王을 삼아 대대로 세습世襲하였으며,  진왕辰王이 자립하여 왕王이 되지는 못하였다. 위략魏略: 그들은 [

동아시아의 권력 투쟁_마한,동예,낙랑

 동아시아의 권력 투쟁_마한,동예,낙랑 //  ["[한나라 시즌2後漢의] 환제桓帝·영제靈帝 말기末期에는  한韓과 예濊가 강성하여 [한漢 왕조의] 군郡·현縣이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니,  [군현郡縣의] 많은 백성들이 한국韓國(=마한)으로 유입되었다. 건안建安 연간(A.D.196~220; 백제百濟 초고왕肖古王 31년~구수왕仇首王 7년)에  공손강公孫康이 (낙랑군의) 둔유현屯有縣 이남의 황무지를 분할하여  대방군帶方郡으로 만들고, 공손모公孫模·장창張敞 등을 파견하여  한漢나라의 흩어진 백성(遺民)을 모아 군대를 일으켜서 한韓과 예濊를 정벌하자,  [한韓·예濊에 있던] 옛 백성들이 차츰 돌아오고, 이 뒤에 왜倭와 한韓은 드디어 대방帶方에 복속되었다."_삼국지 동이전 마한편  ] "시간의 먼지를 털어내며, 아카이브의 깊은 층에서 찾아낸 문서 - 한나라, 후한의 마지막 단계, 환제와 영제가 정권을 잡고 있던 시기에 이르러, 그들의 팔로 자립한 두 힘세고 독립적인 영토, 한과 예를 통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한나라의 법적 구조 아래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떠나고, 새로운 터전, 한국(혹은 마한으로 불리는 곳)으로 향했다. 건안 연간(기원후 196~220년) 동안, 공손강은 낙랑군의 둔유현 이남의 황무지를 분할하여 대방군을 설립했다. 그는 공손모와 장창을 보내 한나라의 흩어진 백성들을 모아 군대를 조직하고 한과 예를 정벌하였다. 이는 공예에서 모래알로 바뀌어가는 시간의 유리병 같은 상황이었다. 그 결과, 오래전의 사람들, 분산된 한나라의 백성들이 점차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이 끝난 뒤에 왜와 한은 마침내 대방에 복속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마치 분산된 빛을 프리즘으로 모으는 것처럼, 대방군의 설립과 함께 분산되었던 한나라의 백성들이 다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한나라의 군대로 다시 모여들었고, 그 군대는 한과 예를 정복하며 한나라의 힘을 되찾았다. 그리고 이는 한나라의 백성들이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오기 시작하

삼국지 시대 초기 병신이 되어있던 낙랑군 The early Three Kingdoms period when Nakrang-gun was cripp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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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early Three Kingdoms period when Nakrang-gun was crippled. 삼국지 시대 초기 병신이 되어있던 낙랑군  글쓴이 : 책사풍후  // "[한나라 시즌2後漢의] 환제桓帝·영제靈帝 말기末期에는  한韓과 예濊가 강성하여 [한漢 왕조의] 군郡·현縣이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니,  [군현郡縣의] 많은 백성들이 한국韓國(=마한)으로 유입되었다. 건안建安 연간(A.D.196~220; 백제百濟 초고왕肖古王 31년~구수왕仇首王 7년)에  공손강公孫康이 (낙랑군의) 둔유현屯有縣 이남의 황무지를 분할하여  대방군帶方郡으로 만들고, 공손모公孫模·장창張敞 등을 파견하여  한漢나라의 흩어진 백성(遺民)을 모아 군대를 일으켜서 한韓과 예濊를 정벌하자,  [한韓·예濊에 있던] 옛 백성들이 차츰 돌아오고, 이 뒤에 왜倭와 한韓은 드디어 대방帶方에 복속되었다."_삼국지 동이전 마한편  삼국지 시대 초기 병신이 되어있던 낙랑군. 낙랑군의 많은 백성들이 한국(마한)으로 끌려가거나 혹은 탈출. 이 시기 마한과 예(=동예=삼국사기 백제본기엔 '말갈'로 나옴.)가 '강성'했다.  이 시기 마한의 왕으론 어떤 자가 있었을까.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따르면 초고왕,구수왕이 있다. 비록 백제의 왕인 것처럼 나오지만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편을 보면 근초고 때부터 비로소 백제의 역사를 적기 시작했다고 나오기 때문에 근초고 이전의 백제 왕들은 사실은 백제 왕이 아니라 마한의 부족국들의 대족장들의 얘기들일 수 있다. 다시 본래 하던 삼국지 동이전 얘기로 돌아와서..., 이대로 놔두면 낙랑군이 사라져버릴 수도 있는 일. 이를 보다 못한 요동의 공손씨 가문이 끙...갈!하고 낙랑군의 둔유현 남쪽의 황무지(인간들이 다 떠나버려서  황무지가 되어있는 낙랑군 남부 지역)를 낙랑군에서 분할해서 '대방군'이란 새로운 식민지를 뚝딱 만듬. 그리고 공손모,장창 2명의 장군을 보내서 한나라의 흩어진 백성들을 모음.  그런 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