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024의 게시물 표시

적는 중)삼국지 위서 무제기의 진동장군에 대한 검토

삼국지 위서 무제기의 진동장군에 대한 검토 글쓴이 : 책사풍후  다음은 삼국지 위서 무제기 즉 삼국지 조조전의 기록이다. 조조는 서기 196년 봄 정월 한나라 황제를 구출했다. 당시 한나라 황제는 사실상 전국을 통제하는 실권이 사라졌으나 아직 그 상징성은 충분히 있었고 전국의 호족들을 움직일 수 있는 거대한 명분 카드였고  이용 가치가 많았다.  조조의 책사인 순욱,정욱은 황제를 잡아야한다고 말했고 조조는 이를 따랐다. 그 후 한나라 황제는 조조 덕분에 구출되어 이리 저리 떠돌던 황제의 인생은 비로소 안정 기로에 접어 든다. 황제는 서기 196년 여름 6월 조조를 '진동장군(鎭東將軍)'으로  임명했다. 이것은 황제의 결정이 아니라 조조의 요청에 따른 황제의 임명으로 봐야 될 듯하다.   '진동장군(鎭東將軍)'이란 관직은 고대 중국의 '사진장군(四镇将军)' 제도는 한나라와  위진남북조 시대에 걸쳐 등장한 것으로, 중국 고대의 고위 무관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  이들은 주로 국가의 주요 방위를 담당하며, 동서남북의 주요 지역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四镇将军'은 특정 지역의 군사적 방어와 지역 안정을 책임지는 고위직 군사 지휘관으로, 황제의 중앙 정부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으면서 지방의 안보를 담당했다.   조조는 이 진동장군이란 관직을 통해 중국의 동부 지역인 산동반도,하남성 등지를  자신의 영역으로 만들려고 한 듯 하다.  서기 12세기 후반에 일본 사무라이 '미나모토 요리토모'가 타이라 가문의 전횡과 무단적 횡포로부터 일본 황제를 구출해준 후, 일본 황제를 대신해 일본열도의 동부 지역을 다스리는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으로 임명된 거랑 비슷한 느낌이다. 진동장군 , 정이대장군은 관직 이름은 다르고 관직의 성격도 다소 다르고  관직이 등장하게된 역사적 성격 역시 다르지만  황제를 대신해 어떤 지역을 다스린다는 점에서 비슷하고 둘 다 고대 중국의 황제국 정치 군사 제도

강동 6주가 평안북도라는게 쓰다 소키치의 식민사관이라고?

강동 6주가 평안북도라는게 쓰다 소키치의 식민사관이라고? //대한제국 중등교과 동국사략 상上편의 2차 고려거란전쟁 서기 1010년에 대한 내용  [ 목종(穆宗)이 강조(康兆)에게 시해당한 후인 현종(顯宗) 원년(1010), 즉 지금으로부터 896년 전1)에 거란[契丹] 왕 성종(聖宗)이 보병과 기병 40만을 이끌고 칭하여 이르기를 의군천병(義軍天兵)이라 하였다. 강조의 죄를 묻는다 하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흥화진(興化鎭)【평안도 의주(義州) 속현(屬縣)】을 포위하였다. 현종이 강조와 안소광(安紹光)에게 방어하게 하였다. 강조가 통주(通州)【평안도 선천(宣川)】에 출병했다가 거란 군사[丹兵]에게 피살되었다. 거란 군사가 서경(西京)으로 진격하자 왕이 중랑장(中郞將) 지채문(智蔡文)을 보내 도우라 하였다. 지채문이 서경에 이르러 항복하는 자를 죽이고 성문을 닫고 굳게 지키다가 달아나 되돌아가서 서경의 패배 소식을 왕에게 알렸다. 1) 원문에는 897년 전으로 되어 있으나, 896년 전으로 바로잡는다. 원문확대 축소 穆宗이 康兆의게 被弑 後、 顯宗 元年、 距今 八百九十七年 前에 契丹主 聖宗이 步騎 四十萬을 率고 號曰、 義軍天兵이라 康兆의 罪 問다 稱고 鴨綠江을 渡야 興化鎭【平安道 義州 屬縣】을 圍거 顯宗이 康兆와 安紹光을 命야 防禦라、 니 康兆가 通州【平安道 宣川】에 出兵다가 丹兵의게 被殺고 丹兵이 西京을 進攻거 王이 中郞將 智蔡文을 遣야 救援라、 니 蔡文이 至야 降者 誅고 門을 閉고 固守다가 奔還야 西京의 敗報 奏지라 ] // 흥화진이 평안도 의주 속현이라고 적혀 있고 통주는 평안도 선천이라 적혀 있다. 왜 자꾸 엉뚱하게 쓰다 소키치한테 탓 지우냐? 애초에 대한제국의 국사편찬위원회가 정한건데. 무슨 얼어죽을 식민사관이야.  == 『중등교과 동국사략(中等敎科 東國史略)』 은 현채가 학부 재직 시절인 1906년 발행한 『동국사략』을 1907년에 2판을 발행하면서 책 제목을 『중등교과 동국사략』으로 바꾸고 편찬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