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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무인들과 일본의 사무라이들에게 쏘아진 어떤 이상한 기운

 고려의 무인들과 일본의 사무라이들에게 쏘아지는 어떤 이상한 기운? 서기 12세기  더 정확히로는 헤이지(평치=平治) 원년인 서기 1159년.  당시 일본은 고려와는 달리 당당히 황제국을 선언했기 때문에 황제국의 달력을 쓰고있었다. 그래서 연(年)에는 천황이 선포한 연호를 붙였다. 그것이 평치 ...  서기 1159년은 평치의 1번째 해로 원년(元年)이다.....   그리고 이때는 미나모토 요리토모의 아들 미나모토 요시츠네가 태어났다고 정사에 적혀있는 해이기도 하다. 이 때 일본에서 귀족들 시중이나 들던 사무라이들 중 칸무 천황(백제 무령왕의 후손인 백제계 여자의 후손)의 피가  흐르는 '타이라(평씨=平氏=平家=헤이케)' 사무라이의 수장 타이라 키요모리가  라이벌 미나모토 요리토모를 쳐발라버리고 일본열도의 지배자가 된다.   타이라 키요모리 : 이끼끼! 미나모토 요리토모 : 꾸엑 (도망치다가 배신당해 목 잘림) 한편 고려는 여전히 무사들은 귀족들의 천대와 차별을 받았다. 이에 불만을 품고 서기 1170년 정중부,이의방 등 무사들이 거병하여 귀족들을 도륙 대학살하고 고려 왕 의종을 폐위시키고 유배 보낸다.   딱 11년의 차이를 두고 일본에서 무신 정변이 일어나고, 그 후 11년 후에야 고려에서 무신 정변이 일어났다. 무신 정변의 첫 주역이자 고려의 첫 쇼군인 정중부는 서기 1179년 9월 16일 (음력)에 또 다른 무사인 '경대승'에게 반란 당해 뒤졌다. 타이라 키요모리는 서기 1181년 3월 20일에 사망했다.(자연사) 정중부와 타이라 키요모리의 사망 시기는 놀랍게도 몇년의 차이를 두고있을 뿐이다. 타이라 키요모리의 사망 전인,   서기 1180년 4월, 모치히토 왕자는 일본 전국에 숨어있는 미나모토 가문들에게 타이라를 타도하라고 영지(令旨)를 써서 보내고 이끼끼하며 봉기했다가 한달만에 타이라에게 토벌되어 비참하게 최후를 맞았다. 하지만 영지를 써서 보낸 효과로 전국에서 미나모토 가문들이 이끼끼하며 봉기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마

고죽과 낙랑의 관계

 고죽과 낙랑의 관계  //하룻밤에 읽는 고죽국 역사  ​ 고죽국은 베이징 동북쪽 난하 방면에 있으며, 은나라 피가 섞인 북방 야만족으로 기원전 7세기 때 중국 산동반도의 군벌인 환공이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정벌하여 고죽과 이웃 마을 '영지' 뿐 아니라  요서 조양시의  '도하'란 종족과 요서 홍산의 '산융'까지 모두 환공에게 격파되어 복속당했습니다. (이 산융,고죽,영지,도하가 바로 비파형동검을 처음으로 만든 요서의 패왕 기마민족 '하가점상층문화'입니다.) 그후 베이징의 연나라 문화의 영향이 서서히 들어와서 비파형동검 문화의 중심지는 요동으로 이동했다가 다시 요서에서 비파형동검 문화가 창성할 조짐을 전국시대 초기 쯤에 보이다가 연나라 장수 진개에게 정벌당해 요서는 물론 요동까지 연나라 땅이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고조선 문화는 북한 땅으로 쪼그라들었습니다.  ​ //그런데 혹자들은 고죽국이 있던 곳(베이징 동북쪽 난하 방면)에 '낙랑'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 //낙랑이란? 낙랑은 고조선 말기 위만조선 당시 위만조선의 심장부인 북한 평양 일대를 일컫던 지명 혹은 고조선의 또 다른 국호로 추정됩니다. 한나라가 고조선 그러니까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식민지를 설치할 때 식민지의 이름을 '낙랑'이라 하였습니다. ​ //베이징 혹은 난하 쪽에 낙랑이 있다는건 사이비들의 주장  어떻게 한나라가 설치한 식민지 낙랑이 난하의 고죽에 있겠습니까. 북한 땅에 있다고 봐야 맞습니다. ​ //하룻밤에 읽는 낙랑군의 커맨드센터 이동 서기 313년 고구려 미천왕이 얍얍하고 퍽퍽 패서 낙랑군이 으악하고 만주 서쪽 요서로 날라갔습니다.(중국 기록에 그렇게 나옵니다.)  그때 요서에는 '모용선비'란 무시무시한 기마민족이  살고있었습니다. ​ 그 후 서기 420년 쯤 고구려 장수왕 때 고구려의 영향력이 요서에까지 미치고 있었습니다. 서기 420년 쯤 북위 황제가 요서 모용선비 땅으로 이사가있